직속상사와 헤어지는 방법
늘 가까이 하던 동료와 헤어지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동료들과의 헤어짐은 숱하게 겪어서 이제 익숙하지만,
직속상사와의 헤어짐은 많은 고민을 남깁니다.
관계상 아무 문제 없지만 자발적으로 제가 떠날 때는,
더 이상 제가 해야할 일이 없어진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크게 미안해하거나, 아쉬워할 일은 없었습니다.
직속상사가 더 위의 상사로 인해 잘려나간 적은 꽤 있었는데,
그런 경우 늘 '공공의 적'이 있으니 아쉬움이 컸죠.
4년전에 있었던 그 사건 때에는 정말로 하늘을 찢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직속 상사로부터 잘려나간 적은 다행히 아직까진 없었는데,
언젠가 한번 당할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똥 묻은 휴지'나 '고양이 시체'를 소포로 보낼 것도 같습니다.
경우의 수를 따지다보니, 직속상사가 제발로 나가는 경우도 있겠군요.
직속상사와의 관계가 관계가 좋았다면 "섭섭"해서 울테고,
관계가 안좋았다면 "시원"해서 울겠지요.
솔직히 이런 케이스 자체를 생각도 못하다가 이번에 처음 겪어봤습니다.
섭섭하진 않았습니다.
떠나고 남은 제가 앞으로 겪게될 상황을 생각해보면 열이 좀 받긴 하지만,
순전히 본인의 자발적 의지로 용단을 내린 일이고, 본인에게 더 좋은 기회이니,
같은 샐러리맨으로서 오히려 경하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할 일이더군요.
다만 이상하게 제 마음에는 상실감, 혹은 결핍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3년간 몇번의 크고 작은 갈등도 있었는데,
도대체 그 이상스러운 감정이 무엇인지,
떠난다는 말을 처음 듣고 부터 환송회를 거쳐 마지막 배웅까지의 24일간,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기분에 하루하루 깊은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환송회 때 그렇게 술을 퍼마시면서도 팀장님과는 단한번도 술잔을 부딪힐 수 없었습니다.
선물을 줘야하는데 선물의 의미를 정하느라 마지막날까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기념 촬영 때는 찍사가 내 표정이 울상이라고 다시 한번 더 찍었답니다.
드디어 늘 지저분하던 팀장님의 책상이 말끔히 청소되고,
늘 제 옆자리에 계시던 팀장님의 온기가 책상 위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진지한 상의도 없이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버린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닥치다보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제가 느꼈던 그것에 관해 그제서야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팀장님은 직속상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저와 일에 관해 속속들이 이야기하며 고민할 수 있고,
또한 저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던,
이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 안에서 유일한 지지자이고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과거 친했던 동문 선배가 떠나도, 혹은 마음 맞던 동료가 떠나도,
그래도 별 걱정 없이 든든했던 것은, 제 곁에 팀장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나봅니다.
다른 팀에서, 다른 회사에서 오라고 아무리 제의를 해도,
제 마음의 발목을 한순간도 놓지 않고 잡고 있었던 것은 팀장님이었습니다.
물론 팀장님 또한 자신의 상사들을 모시는 입장에서,
저라는 놈 때문에 그간 마음고생을 꽤 많이 하셨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팀장님 떠나시던 날 또다시 터졌던 어떤 사업상 이슈가 있었는데,
팀장님께 더 이상 털어놓지도, 이메일 참조도 보낼 필요가 없더군요.
밀려오는 답답함과 함께 이것이 앞으로 한동안 그럴 것이란 생각에 미치니,
팀장님이 어떤 존재였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갑'과 이야기할 때는, 간을 떼놓고 이야기해야하고,
'을'과 이야기할 때는, 간을 태우며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가도, 간을 옥죄이며 숨죽여 지내야 했습니다.
KT나 Paran과는 무관한 사업이다보니 회사에서 관여하는 사람들도 없고,
늘 혼자서 사업을 맡아서 하다보니, 같은 팀이나 본부라 할지라도,
그 사업을 왜 하냐는 이야기만 3년째 들을 뿐입니다.
맨날 혼자 양복 차려입고, 늘 칼퇴근했다가 오전 늦게 출근하는 저를
근태불량에 제멋대로 사는 또라이로만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을겁니다.
가족이나 친지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만 기대하니 서로 답답하고,
친구들은 늘 제 편이긴 하지만 낱낱이 제 상황을 알지는 못하니 서로 답답하며,
애인은 있지도 않지만,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점쟁이의 조언을 들어보면 팔자라는 것을 인정할만큼 늙고 싶진 않고,
술집 사장님들은 상황은 들어주지만 서로 무슨 말을 했는지 깨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이제 월요일부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냉엄한 직장 생활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런 허허벌판에 날 버려두고 가신 팀장님...
10년만의 첫 이직, 부디 꼭 성공하십시오.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저희들 용서하시고,
저희한테 해주셨던 것만큼, 그곳 분들께도 해주신다면,
팀장노릇만 하느라 한동안 묵혀두었던
팀장님의 그 빛나는 능력 제대로 백분 발휘하신다면,
여기서 그러하셨듯이, 그곳에서도 전설이 되실거라 믿습니다.
피곤하다고 점심 거르지 마시고,
집하고 가까워지셨으니 시간내서 운동도 좀 하시고,
저희가 드린 화장품 아침 저녁 꼭 애용해주시고,
그곳에서도 본부장님처럼 좋은 상사와,
U2와 서태지, 환타지 무비 매니아들이 즐비하고,
"삘" 받으면 함께 날새며 토론해줄 동료들이 많길 바랍니다.
PS. 무릎팍 도사에서처럼 제대로 크게 만들어드리고 싶었으나,
'기술력'의 한계로 무위에 그쳤던 선물 후보 중 하나
(Illustrated by Ho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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