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의 전쟁하는 방법
잡생각
2007/05/08 23:24
고군분투 [孤軍奮鬪]
[명사]
1 외로이 떨어져 있는 군사가 많은 수의 적군과 용감하게 잘 싸움.
2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잘해 나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나는 본질적으로 미련하거나, 혹은 피가학성 변태이기 때문에,
조직의 리소스를 끌어내는 이성적 노력에 취약하다.
즉, 혼자서 가슴 찢어니고 머리 터지게 일해도 대체로 즐겁기 때문에,
왠만해선 '인적인' 혹은 '물적인' 리소스를 내놓으라는 말을 잘 안한다.
그래서 늘 고군분투해왔고, 집념과 아집 사이에서 스스로 헛갈려하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나 스스로 내 일을 그만둔 이유는 아래 둘 외에는 없다.
1) 더 이상 이 조직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없을 때
외부 환경의 변화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고, 이제는 다른 사람도 할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내가 안해도 되는 일이 되버린 셈이다. 난 심심하거나 평범한건 못견딘다. 그래서 그만둔바 있다. (첫번째 회사, 두번째 회사의 세번째 회사)
2) 같이 일할 필수 인원이 확보되지 않을 때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본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되었거나 (두번째 회사의 첫번째 회사), 나 빼고 모든 직원들이 퇴사해서 같이 일을 해야할 필수 인원이 확보되지 않을 때 (두번째 회사의 두번째 회사)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결코 내가 후회가 없는 것은, 내가 맡은 부분에 있어서는 목숨걸고 최선을 다했고, 리소스 없이 해낸 것 치고는 성과도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더 큰 일, 많은 일을 해내려면, 리소스를 갖춘 회사에서 일해야 하고, 커리어상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스케일 좀 키우자는 것이 이 회사에서 얻으려는 커리어의 핵심이다. (SW업계가 나이 등의 이유로 BDM을 안시켜준 건 중요한 빌미다. 액면가만큼 얼른 늙는게 내 소원이다)
그런데 지금도 혼자서 고군분투 중이다.
내가 회사를 과대평가했거나, 회사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붙들고 있다.
이제는 가슴에 꽂은 칼이 아흔아홉개쯤 되는 것 같다.
지난달 택시 영수증이다.
우리 회사에선 외근 나가면 다 놀다 오나보다.
운동화에 티셔츠 입고 다니는 회사에서 맨날 양복 입는 것은 이제 덜 뻘쭘한데,
외근 갔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시달리다 들어옴에도
으레 대충 놀다 들어왔겠거니 하는 시선을 받는 일은 아직은 견디기 힘들다.
시선 자체가 아니라, 이런 한가한 영혼들과 함께 존재해야하는 내가 한심하다.
오늘은 유난히 빡 도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빡이 돌아있다가, 빡이 돌아서 나가서, 빡이 돌게 시달리다가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5층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지표면 충격량을 계산하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 코스 Think Board (우리회사 주니어보드) 주간회의가 있었는데,
밖에서 고문 당하느라 무려 한시간이나 지각을 했다.
고문당한 흔적을 안비치려 나름 애썼건만,
예민한 여성 위원 두분께서 내 안면근육의 파동과 어깨의 수직각도가 기이했는지
회의 도중 세번째 전화를 받고 들어오는 내게 쪽지 하나를 건내줬다.
복분자팩 100개 + 녹용팩 100개 + 홍삼팩 100개 + 칡즙팩 100개를 먹은 것 같다.
참고로, 이 어여쁜 처자들 모두 아줌마 혹은 2주 후 아줌마가 될 예정이다.
어떻게 하면 술 안먹고 오늘밤을 참을까 고민하며 집에 돌아와보니,
외장하드 120G, Altec Lansing 2.1채널 스피커, MS 헤드셋, 그리고 새 책 13권이 도착했다.
뜯어보고 놀다보니 시간 잘 간다. 피곤하다.
전쟁이 하루하루 치열하고 가혹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과거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패턴들이 감지된다.
이제 베팅 좀 해야겠다.
백번째 칼 꽂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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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분투 잘 읽고 갑니다.
엔터프라이즈2.0 후기 읽으면서 요즘 구독을 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글을 상당히 잘 쓰시네요. 묘사기법을 위주로.. ^^
좀부담스럽습니다만.. 감사합니다..^^;